2002년 2월 13일 수요일 D-1
- 그래 .. 내일 간다고? 그래도 어떻게 설은 보내고 입대하게 되서 그나마 다행이구나 .. 남자라면 한 번쯤 다녀와야지 .. 군대도 이젠 뭐 옛날같지 않아서 그렇게 힘들거나 하지도 않을거다 .. 녀석 .. 많이 컸구나 .. 몸 건강한 게 제일 중요하고, 휴가라도 나오면 꼭 들르고 ..
네, 네, 네.
벌써 몇 번째 듣는 말인 지 모른다구요.
이건 세배 드리는 분들마다 시작되는 일장 연설이시다.
오늘까지가 설날 연휴 .. 그리고 연휴의 끝 첫 평일의 시작 14일, 바로 내일 오후 1시 육군 훈련소. 논산에 있단다. 거 참 .. 더 이상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날짜를 1월로 넣었는데 .. 아무래도 복학 시간 관계 때문인지 사람이 많아 2월로 밀려서 날짜가 나와 버렸다. 그러면 .. 군생활이 2년 2개월이라고 하니 .. 전역일이 2004년 4월 13일 .. 바로 복학은 힘들겠네 . .음 ..1월이었으면 딱인데 .. 바로 복학하고 ..
- 그래, 그러면 전화라도 자주 하고. 잘 다녀와라.
앗, 끝났다 .. 으하. 인사하고 .. 뭔가. 군대 간다고 하면 다들 그렇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으신지 무릎 아파 죽겠다. 큰집을 나와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확 비치는 햇살에 눈이 따갑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는데 구름 한 점 없다. 날씨 참 욕 나오게 좋네 .. 에효.
그래도 군대 가기 전에 이렇게라도 친척들 얼굴 한 번 다 보고 가게 돼서 다행이다 .. 친구놈들도 볼 사람 다 봤고 .. 내일 내가 정말 군대라는 데를 가긴 가나? 하긴 .. 이미 늦었으니, 뭐. 이젠 안 간 친구들보다 간 친구들 수가 더 많아져 버렸으니 .. 2004년엔 나도 웃고 있을테다 .. 2004년에는. 그래도 아직은 차가운 바람에 밀어버린 민둥머리는 괜시리 시렵고 마냥 어색하다. 괜히 한 번 머리 쓰다듬어 보고 기지개 한 번 펴본다.
여러 친척들 마저 인사도 드리고. 어렸을 때 이뻐해 주셨던 할머니댁 동네 어르신들도 찾아뵙고. 저녁엔 외가댁도 들러서 똑같은 말씀 비슷한 일정 거쳐 밤늦게 집에 도착했다.
대충 씻고 내일 일찍 나가야 한다고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막상 또 누우니 잠이 안 온다.
.. 이젠 이렇게 내 방 천장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구나.
우하. 뭐냐, 웃기게 혼자 영화를 찍지, 아예 .. 다들 갔다 오는데 나라고 뭐 못하겠냐. 10년도 아니고 2년 딱 눈 감고 있다 오면 된다 .. 그래그래 ..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잠깐 갔다가 오자구. 논산에 가서 그래도 점심이라도 먹고 들어가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될테니 .. 일찍 자자.
.................
참 .. 그래도 군대 간다고 마지막 글 정도는 남겨야지.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부팅되는 걸 바라보고 앉아 있는데 또 혼자 괜히 감상이다.
- 컴퓨터 .. 도 이제 당분간은 안녕이네 ..
02학번..이라는 학번들은 어떻게 생겼을래나. 벌써부터 과 카페에 글을 남기는 애들도 있고 .. 나중에 다녀 오면 과 대부분이 모르는 얼굴들이겠네. 남길 글 다 남기고도 뭔가가 못내 아쉬워 하릴없이 여기 저기 평소 읽지도 않던 게시판 글들 마냥 읽다가 문득 자야지 정신 차리고 컴퓨터 끄고 다시 자리에 눕는다.
그냥 꿈 꾸고 오는 거라고 .. 뭘 그리 감상에 젖냐, 바보같이. 어린애도 아니고. 2004년 4월엔..뭐를 할까. 일단 한 1주일은 원없이 자고 .. 알바라도 해서 여행이나 한 번 죽 다녀와야겠다. 복학은 언제 하지? 밖에도 한 번 나갔다 와야 할텐데.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제대라도 한 것 같네 그냥 .. 흐.
2년 2개월 전에는 내가 뭘 했더라 .. 1999년 12월. 수능 막 마치고 논술 본다고 준비하면서 애들이랑 막 놀고 다닐 때구나. 00학번이라고 입학해서 아주 사방을 활개치고 다니다가 2학년 마치고 이제 군대간다고 하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내가 제대를 하는 구나. 2년 동안 학교에선 참 이런 일 저런 일 많이 있었는데 ..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내가 나오는 구나.
갑자기 2004년이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몇 시야 .. 으하 .. 자야 되겠다. 생각을 하지 말자 .. 그냥 머리를 비우고 .. 눈 감고 이대로 가만히 그냥 ..
... 그리고는 꿈을 꾸었다.
갑자기 통일이 되어 군대가 없어졌단다. 먼저 군대 간 친구들이 억울하다고 하고
나는 좋다고 막 다시 게시판에 글 올리고 하는 그런 꿈이었다.
너무 좋아서 막 뛰어다니는 그런.
이글루스 가든 - 제대로 된 글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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